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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헨베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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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이헨베르크 전투는 1757년 4월 21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7년 전쟁의 전투이다.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로의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며 오스트리아군을 유인했고, 라이헨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지형을 이용해 방어 진지를 구축했지만, 프로이센군의 기습적인 공격과 기병의 활약에 패배하여 라이헨베르크를 점령당했다. 이 전투는 프로이센에게 전략적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이후 프로이센군은 프라하 전투로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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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헨베르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라이헨베르크 전투 계획
라이헨베르크 전투 계획
전투라이헨베르크 전투
일부제3차 슐레지엔 전쟁 (7년 전쟁)
날짜1757년 4월 21일
장소리베레츠, 보헤미아, 현재의 체코
결과프로이센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로이센
교전국 2오스트리아
지휘관 및 병력
지휘관 1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
지휘관 2쾨니히세크 백작
병력 115,000명
병력 214,000명
사상자
사상자 1655명
사상자 2874명
캠페인 정보
예슈테트 산에서 내려다 본 현재의 리베레츠와 이전 전장. 평야 너머가 이제라 산맥.
예슈테트 산에서 내려다 본 현재의 리베레츠와 이전 전장. 평야 너머가 이제라 산맥.

2. 배경

1756년 겨울, 필르나 포위전과 로보지츠 전투의 결과 작센 군이 항복한 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양군은 전역을 마치고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프로이센군은 엘베 우안 라우지츠의 츠비타우를, 오스트리아군은 보헤미아 북부의 라이헨베르크를 각각 전선 기지로 삼아 겨울 숙영 중에도 국경을 넘어 소규모 교전을 반복했다.

1757년 봄,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로의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슐레지엔에서 서진하는 슈베린 군의 진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보헤미아 북부 엘베 우안 지역의 오스트리아군을 최대한 북쪽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베버른은 3월부터 라우지츠에 주둔하는 프로이센군을 지휘하여 부대를 활발하게 움직여 오스트리아군의 주의를 끌었다. 쾨니히스에크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대비해 보헤미아 북부의 오스트리아군을 집결시켰다. 쾨니히스에크는 봄 이후의 자군 공세에 대비하여 전진 배치된 물자 기지를 지키기 위해 국경 근처의 라이헨베르크에서 방어전을 계획했지만, 이는 프로이센군의 의도대로였다.

3. 전투 준비

1756년 겨울, 필르나 포위전과 로보지츠 전투 결과 작센군이 항복한 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양군은 전역을 마치고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엘베 우안 라우지츠 주둔 프로이센군은 츠비타우를, 보헤미아 북부 주둔 오스트리아군은 라이헨베르크를 각각 전선 기지로 삼아 겨울 숙영 중에도 국경을 넘어 소규모 교전을 반복했다.

1757년 봄, 프로이센군은 보헤미아로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슐레지엔에서 서진하는 슈베린 군의 진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보헤미아 북부 엘베 우안 지역 주둔 오스트리아군을 최대한 북쪽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었다. 라우지츠 주둔 프로이센군 지휘관 베버른은 3월부터 부대를 활발하게 움직여 오스트리아군의 주의를 끌었다.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대비해 보헤미아 북부 오스트리아군도 집결했으며, 쾨니히스에크가 지휘를 맡았다. 쾨니히스에크는 봄 이후 자군 공세에 대비, 전진 배치된 물자 기지를 지키기 위해 국경 근처 라이헨베르크에서 방어전을 계획했지만, 이는 프로이센군의 의도대로였다.

4월 20일, 프로이센군은 츠비타우에서 보헤미아로 진격을 시작했다.[4] 오스트리아군 전초 부대와 충돌하며 행군한 프로이센군은 같은 날 밤 라이헨베르크 북서쪽 하벤도르프에 도착, 라이헨베르크를 눈앞에 두고 다음 날 전투를 기약하며 야영했다.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군은 라이헨베르크 북쪽에서 예슈켄 산에 이르는 나이세 계곡 지형을 이용, 진지를 구축하고 프로이센군을 기다렸다.[4] 라이헨베르크는 수데테 산맥의 이저 산맥 남서쪽 기슭에 있으며, 서쪽으로 2~3km 폭의 평지를 지나면 예슈켄 산이 있어, 북쪽을 정면으로 동서로 진을 치면 정면 폭을 한정하고 양 측면을 고지에 맡길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두 고지를 양쪽 날개 끝으로 진지화하고, 그 사이 평지에 주력 부대를 전개하여 프로이센군을 막았다.

쾨니히스에크는 진지의 기점인 라이헨베르크를 전열 우익단 방어 거점으로 삼고, 라시를 배치하여 지키게 했다.[4] 마을 주변 고지는 요새화되었고, 나이세 강이 기슭을 흘러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으며, 배치된 중포가 서쪽으로 뻗은 자군 정면을 잘 커버했다. 나이세 강 맞은편 로젠탈에서 서쪽으로 평지 위에 야전 보루를 축조하고, 그 배후에 주력 보병 부대를 전개했다. 평지 보병은 병력 부족으로 우익에서 중앙에 걸쳐 전열 보병으로 지키게 하고, 중앙에서 좌익에 걸쳐 포르포라티 지휘 기병을 집중 배치했다. 기병 부대 서쪽, 예슈켄 산 기슭 고지에도 보병을 올려 좌익단 방어를 맡겼다. 숲 속에도 보병 부대를 배치하고, 말뚝 울타리를 심어 진지를 구축했다. 기병 부대 간 전투 시, 기병 양익 보병 부대가 양 측면에서 적 기병에게 화력을 퍼부어 지원하는 계산이었다.[5] 오스트리아군 배치는 이 시대 통례와 반대로, 기병이 중앙, 양익을 보병이 담당하는 형태였다.

쾨니히스에크는 라이헨베르크 진지 외 다른 계책도 있었다.[4] 보헤미아 북부에는 쾨니히스에크 본대와 별도로, 7개 보병 연대와 3개 기병 연대로 구성된 맥과이어 지대가 라이헨베르크 서쪽 가벨에 집결해 있었다. 쾨니히스에크는 자신과 베버른이 라이헨베르크에서 맞붙는 동안 맥과이어 지대를 츠비타우에서 라이헨베르크로 가는 진로상의 크라초우로 진출시켜 적의 후방 연락선을 끊으려 했다.

4. 전개

4월 21일 이른 아침, 베베른은 마콰이어 부대가 츠비타우와의 자군 연락선상으로 진출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6] 츠비타우로 가는 길에는 보급을 위한 수송 차량 행렬이 있었기 때문에, 베베른은 쾨니히스에크와의 전투 전에 발네리에게 경기병 전력의 절반을 주고 급파했으며, 보병 부대의 일부도 뒤따르게 했다.

프로이센군은 벨츠도르프 부근에서 나이세강 지류 벨츠도르프강에 교량을 건설하여 적전 도하를 감행했다.[7] 베베른은 적 좌익에 주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레스트비츠가 지휘하는 주력 보병 전열에게 적 정면을 막게 하고, 2개 척탄병 대대에 왕태자 보병 연대의 지원을 붙여 적군 좌익 끝의 숲 속에 자리잡은 적 보병을 몰아내라고 명령했다.[7]

용기병 3개 연대로 구성된 프로이센군 기병의 돌격에 대해 오스트리아군의 제1전선을 담당하는 리히텐슈타인 용기병 연대는 과감하게 맞섰지만,[4] 수적으로 열세하여 후방의 제2전선 쪽으로 패주했다. 그러나 숲 속에 있던 오스트리아군 좌익 보병이 프로이센군 기병에게 측면 사격을 가했고, 프로이센군 기병은 궤멸되었다.[7] 오스트리아군 기병 부대는 이 틈을 타 반격했지만, 프로이센군 기병 예비인 푸트카머 경기병 연대가 적 기병의 측면을 공격하자, 다시 무너졌다.

5. 전투

베베른은 기병 부대, 우익 보병 부대를 전진시키고, 레스트비츠의 주 전열도 적 정면을 향해 전진시켰다. 쾨니히스에크는 즉시 병력을 진지에서 철수시키고, 전장에서의 철수로 전환했다. 마콰이어가 프로이센군의 후방 연락선상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발네리가 나이세강을 따라 그 기병을 배치하여 오스트리아군에게 도하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마콰이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4]

6. 결과 및 영향

베베른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은 라이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하여 라이헨베르크를 점령했다. 쾨니히스에크는 리베나우까지 후퇴하여 매과이어와 합류한 후, 지형을 이용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프로이센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쾨니히스에크는 적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리베나우의 진지를 포기, 프로이센군에 의한 포위를 피해 탈출했다. 이후 쾨니히스에크는 이저강 서안을 강행군으로 남하하여 베베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융-분츨라우를 구출하려 했으나, 슈베린이 먼저 이저강 동안에 부대를 진출시켜 오스트리아군의 도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융-분츨라우 구출에 실패한 쾨니히스에크는 엘베강 우안 지역의 방어를 단념하고 브란다이스로 철수했다.[1]

카를 공자가 쾨니히스에크를 프라하로 불러들였으므로, 프로이센군의 도하를 저지할 세력은 없어졌다. 이후 전역은 프라하 회전으로 이어져 간다.[1]

이 전투는 7년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프로이센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프로이센의 승리가 과장되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의 저항 또한 간과할 수 없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참조

[1] 웹사이트 1757-04-21 - Combat of Reichenberg - Project Seven Years War http://www.kronoskaf[...] 2020-08-20
[2] 간행물 Prussian Forces Battle of Reichenberg 21 April 1757 https://usacac.army.[...] United States Army Combined Arms Center
[3] 웹사이트 1757-04-21 - Combat of Reichenberg - Project Seven Years War http://www.kronoskaf[...] 2020-08-20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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